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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팁/생활정보

고사성어 모음8

by 낭만ii고양이 2018. 6. 1.





 

◈결초보은(結草報恩)◈ 

016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개가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오." 


춘추시대 진(晋)나라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 

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를 개가시키도록 하라." 

고 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 

들 과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으면 네 서모를 반드시 순사(殉死, 남편과 함께 순장시키는 것)케 

하라." 

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는, 

"사람은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님께서 맑은 정 

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라야겠다." 

하고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개가시켰다. 

그 후 진환공(秦桓公)이 진(晋)을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 

다. 

진(晋)의 경대부로 있었던 위과(魏顆)는 이 싸움에서 진(秦)의 두희라고 하 

는 매우 힘이 센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두희는 위과가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두희의 발 앞에 풀을 엮어(結梢) 그가 걸려 넘어지 

게 하여 위과가 두희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결전이 끝난 후 위과는 자기를 도와준 그 노인이 누굴까 하는 생각을 하 

다 잠들었는데, 꿈에 바로 그 노인이 나타나 위와 같은 말을 해준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017 

(임금이 미혹되어 국사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미인) 




북방에 가인(佳人)이 있어 

절세로 단 한 사람뿐 

일고(一顧)하면 성을 기울이게 하고(傾城) 

재고(再顧)하면 나라를 기울이게 하네(傾國) 

어찌 경성, 경국을 모르리요마는 

가인은 두 번 다시 얻기 어려우리. 


「한서」의 '이부인전'에 나오는 말이다. 

한무제를 모시고 있던 가수(歌手) 이연년이 위의 노래를 지어 바치면서 자 

기 누이를 가리켜 경국지색이라고 했다. 

이에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였는데, 과연 그 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춤솜씨 또한 대단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바로 이부인(李夫人)이다. 

경국이란 말은 이백(李白)의 '명화경국양상환(名花傾國兩相歡)'과 백이거의 

'장한가(長恨歌)'에 '한왕 색을 중히 여겨 경국을 생각한다'라는 구절에도 나온 

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두고 다툴 때 유방의 부모와 처자가 항우의 포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후공(候公)이라는 말솜씨가 좋은 선비가 항우를 설득해 

서 유방의 부모처자를 돌아오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후공을 가리켜, 

"그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는 병설로 나라를 기울이게 한 

다." 

라고 칭송하였고, 유방은 그에게 많은 상과 함께 경국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평국군(平國君)'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경원(敬遠)◈ 

018 

(존경은 하면서도 가까이 하기를 꺼린다는 말) 


자기 자신의 일에만 노력하고 귀(인간의 영혼)나 신을 공경하면서 멀리하면 지(知)라고 할 수 있다. 


윗글은 공자의 제자 번지(樊遲)가 지(知)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 

가 대답한 것으로, '공경하면서 멀리한다는 것은 귀신을 섬기되 신에 의존하 

거나 신이 무엇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고 길흉화복을 자신의 힘으로 해 

결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知)는 지혜나 지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다운 지식이나 지 

혜는 어떤 것인가? 

세상에는 큰길을 놔두고 지름길로 가려는 사람과 지식의 대상을 이상한 

것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만인이 인정할 수 있는 철학이나 사상, 종 

교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뜨리는 그릇된 사상이나 사이비 종교도 

존재한다. 

초기에는 건전한 철학이나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종교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이 해야 할 도리보다는 기복(祈福)이나 종교를 위한 종교, 종교지도자들을 위한 종교로 잘못 진행되는 현상을 역사상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공자의 근본 가르침을 외면하면 유가 때문에 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미신으로 흐르면 불교 때문에 망하여, 기독교 역시 그 근본을 잃어 

버리면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많은 종교들이 사회발전에 맞추어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면만이 아니라 그 본래 목적과 사상의 발전도 함께 하 

는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계구우후(鷄口牛後)◈ 

019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말)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서면(西面)을 하고서 손길을 마주잡고 진나라를 섬기는 것은 소의 꼬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저 대왕의 현명함을 가지고 한나라의 강병을 옹호하면서도 소의 꼬리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제가 은근히 대왕을 위하여 부끄러워하는 말입니다." 


소진(蘇秦)은 귀곡선생 밑에서 수학한 후, 자기 나라를 떠나 몇 해 동안 유 

세(遊說)하다가 곤궁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형제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일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논의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곤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독서에만 열중하던 소진은 갑자기, 

'사나이도 태어나서 학문을 해서 출세하지 못하면,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는 「음부(陰符)」라는 병서(兵書)를 꺼내 놓고 열심히 읽기 시작 

했다. 

1년이 지나 인생의 의미를 미루어 생각하는 재주를 터득하게 되자, '이 정 

도면 지금 세상의 군주들을 유세(遊說)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계구우후'는 소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한나라로 가서 선혜왕을 만나 한 

말이다. 

"한(韓)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성광은 견고하며, 군인들은 용맹하고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명한 대왕이 계시니 모든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한나라가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 

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올해 진나라가 요구하는 땅을 주면 내년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며, 한 번이라도 거절하면 결국 침략을 당할 것이므로 

진나라를 섬긴다 하더라도 국토를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진은 위와 같은 계구우후론을 펴서 신임을 얻은 후, 계속하여 위, 제, 초 

나라 등으로 유세를 다니며 군왕들을 잘 설득해서 여섯나라와 맹약을 맺고 

힘을 합치게 되었다. 또한 소진은 그 맹양의 장(長)이 되고 육국의 재상을 겸 

하게 되었다. 




◈계륵(鷄肋)◈ 

020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기는 아깝다) 


닭의 갈비는 별로 먹을 것은 없지만 그것을 버리면 아까운 생각이 든다. 

왕은 이곳을 버리고 돌아가기를 결정한 것이다. 


「후한서」의 '양수전'에 나오는 말이다. 

삼국 정립시대가 나타나기 1년 전, 유비가 익주(益州)를 점령하고 한중(漢 

中)을 평정한 다음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군대를 맞아 한중 쟁탈전을 벌이 

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유비의 병참은 제갈 

량의 용의주도한 확보로 넉넉한 데 반해, 조조는 병참을 소홀히 하여 내부의 

질서가 문란할 뿐만 아니라 탈영병이 속출하여 공격도, 수비도 불가능한 상태 

에 있었다. 

그때 막료 한 사람이 현황을 보고하고 후퇴여부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 

던 조조는 닭갈비(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 막료가 어리둥절한 마음 

으로 나오는데 주부(主簿)인 양수(楊修)가 그 소리를 듣고 장안으로 귀환할 준 

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참모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漢中)을 여기에 비유한 것은 승상께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 

하신 것이오." 

라고 답했다. 

과연 양수의 예상대로 조조는 그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술로 유명한 유령이 한 번은 술이 취해 세속 

사람들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상대가 화가 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유령은 말했다. 

"나 같은 닭의 갈비가 어떻게 귀하신 주먹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몸이 허약한 사람을 '새갈비'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가 아닌가 한다. 

◈계명구도(鷄鳴狗盜)◈ 

021 

(천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쓸모 있을 때가 있다) 


이 때 말석에 있던 도둑의 명수가, 

"제가 호백구(狐白, 백여우 가죽으로 만든 털옷)를 가져오지요." 

하고 그날 밤 진왕의 궁중에 몰래 들어가 맹상군의 식객 중 한 사람이 닭 소리를 그럴 듯하게 내기 시작하니, 그곳에 있던 닭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관문은 열리고 맹상군 일행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사기」의 '맹상군전'에 나오는 말이다. 

제나라 맹상군의 인물과 명성을 듣고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자기 나라 

재상으로 삼고자 초빙을 해서 맹상군이 식객 몇 사람과 함께 예물을 가지고 

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재상에 임명하려 하자, 제나라 편만 들 것이라는 반대의견이 

많아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그냥 돌려보내자니 자칫 맹상군이 앙갚음을 하지 않을까 염려된 소양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암살계획을 세웠다. 

이를 눈치챈 맹상군이 사람을 시켜 왕의 애첩에게 도움을 청하니, 

"나에게 호백구를 주면 힘써 보겠소." 

하고 애첩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호백구는 이미 소양왕에게 예물로 바친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만 태우고 있는데, 말석에 있던 도둑의 명수가 호백구를 도둑질해 와서는 

애첩에게 주었다. 

귀국이 허락되자 맹상군은 급히 진나라의 서울을 빠져나가 함곡관(函谷關) 

을 향했다. 

소양왕은 귀국을 허락한 것을 후회하고 바로 군사를 보내어 그 일행을 죽 

이도록 했다. 

함곡관에 도착한 일행은 첫닭이 울어야 문을 열게 되어 있는 규칙 때문에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자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식객 중 닭소리를 그럴 듯 하게 내는 자가 있어, 먼저 닭소리를 내자 모든 

닭들이 그의 닭소리를 따라 울었고, 닭이 울자 관문이 열려 맹상군 일행은 무 

사히 탈출했다. 

소양왕이 보낸 군사들이 함곡관에 도착한 것은 그들 일행이 떠난 지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다. 

맹상군의 진나라 탈출에 대해 사람을 차별 없이 대우한 덕이라고 좋게 평 

하는 사람도 있으나, 송나라 왕안석은 '3천 명이 되는 식객 가운데 한 사람도 

주인이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정세 판단도 해주지 

못하고 막연히 들어가 도둑질, 닭 울음 흉내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아 맹상 

군 밑에는 진짜 쓸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혹평했다. 

◈계포일낙(季布一諾)◈ 

022 

(한 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조구는 매우 화가 나서 계포를 찾아가, '초나라 사람들은 황금 백 냥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한마디 승낙을 받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유명해지셨습니까? 


「사기」의 '계포전'에 나오는 말로서, 초나라 사람 계포는 의협심이 강하 

고 장중한 사람으로 자기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항우와 유방과의 싸움에서 계포는 초나라 장수로 몇 차례 유방을 괴롭혔 

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천금(千金)의 현상금이 걸려 쫓기는 몸이 되 

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를 고발하기는커녕 한고조에게 그를 쓰도록 천거 

까지 하였다. 그 결과 사면이 되어 벼슬을 하고 혜제(惠帝)때는 중랑장(中郞 

將)이 되었다. 

초나라 조구의 변설가이며 권세와 금전욕이 강한 사람으로 경제(景帝)황제 

의 외숙뻘 되는 두장군(竇長君)의 식객이 되었다. 

계포는 두장군에게, 

"조구는 교언영색하는 자이니 교제를 끊으심이 좋겠소." 

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때 조구가 두장군에게, '계포에게 소개장을 써달라'고 부탁하러 왔다. 

두장군은 계포에게서 온 편지를 보이며, 

계포는 자네를 싫어하니 가지 말게." 

하고 말했다. 

그러나 조구는 계포를 찾아가 위와 같은 말을 하여 계포의 환심을 산 후, 

"당신과 나는 동향인이므로 내가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선전하겠소." 

라고 말하자 계포도 싫지 않아 그를 빈객으로 대접했는데, 이 조구로 인해 계 

포는 더욱 유명 인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한 번 한 말을 끝까지 지키는 신의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처세에 매우 유 

익한 것이다. 또 자신의 인물평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해주는 것은 유명해지 

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고굉지신(股肱之臣)◈ 

023 

(다리와 팔처럼 임금이 신임하는 신하) 


순임금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과 같은 신하들은 짐의 팔·다리요, 눈과 귀로다. 내가 백성을 돕고자 하니 힘써 도와달라. 내가 위엄을 온 천하에 떨치려 하니 그대들이 대신해 달라." 


「서경」의 '익직편'에 나오는 위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나에게 어긋남이 있을 때에는 그대들이 나를 보살피며 규정(規正)해 달라. 

내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고 물러간 후에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직접 충고해 달라. 또 전후좌우의 동료들과 서로 

공경하여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라. 관리들은 백성들의 뜻을 나에게 

전하는 것이 임무이니 올바른 이치를 세상에 크게 선양토록 할 것이며, 잘못 

을 뉘우치는 자는 관직에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철퇴를 가해 나라 

의 위엄을 보이도록 하라." 

순임금이 성군이 되는 데는 신하들의 보좌가 필요했고, 나라가 잘되기 위 

해서는 제도의 준수, 인애와 형벌의 병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복격양(鼓腹擊壤)◈ 

024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림) 


"해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서 쉬네.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유가(儒家)에서는 성군(聖君)의 표상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을 꼽는다.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공 

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 

는 반론도 많다. 

천하의 성군으로 꼽히는 요(堯)임금이 천하를 통치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 거리에 나 

섰다. 

어느 거리에 이르렀을 때 어린이들이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 백성 살아감이 임금의 덕 아님이 없네. 느끼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 

면서 당신의 다스림에 따르고 있네." 

이 동요를 듣고 가슴이 설레는데, 저쪽에서 또 소리가 나서 가보니, 백발 

노인 한 사람이 입에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더니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요임금이 마음이 밝아졌다. 

백성이 통치의 역할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태평을 구가하는 사회, 인위 

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 정치를 추구했던 요임금은 자신의 정치이상을 백성들 

의 노래 속에서 확인한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란 요순시대처럼 정치의 역할을 국민이 못 

느끼고 태평을 누리는 것이다. 

후진국일수록 정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의 

20~30%는 정치문제다.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5위 안에 드는 스웨덴에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수상의 이름을 모르는 국민이 51%였다. 

◈고성낙일(孤城落日)◈ 

025 

(세력이 쇠퇴하여 고립무원의 상태) 


장군을 따라서 우현(右賢)을 취하고자 하니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居延)으로 향하네.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簫關) 밖에 옴을 아니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孤城落日)의 가여. 


위의 시는 이백, 두보와 아울러 성당시대(盛唐時代)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왕유(王維)의 시다. 

이 시는 평사(評事, 재판을 맡아 다스리는 관직)가 장군을 따라 변방 밖으 

로 나가는 것을 보내는 시이다. 시대는 한나라를 빌어서 쓰고 있다. 

한나라 시대에 좌우에 현왕(賢王)이라는 흉노족이 있었는데, 우현왕(右賢 

王)이 한 번은 한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친 사건을 바탕으 

로, 우현을 사로잡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엮은 것이다. 여기서는 마치 장군을 

따라 변방에 나아가 외적의 대장을 사로잡은 것처럼 의기가 충천하여 사막으 

로 말을 달려가는 듯한 뜻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시에 담긴 정서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현왕을 포로로 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사막을 달려 거연의 요새로 향 

하였을 때, 멀리 저쪽의 소관(蕭關) 밖에는 한나라의 사자인 당신이 나와 무엇 

을 보고 있을 것인가? 사막에 우뚝 선 외로운 성과 그 근처에 떨어지는 저녁 

해, 그것을 당신은 근심에 잠겨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먼 

그곳에서 풀 방도가 없어 난감해 하는 당신의 기분을 이 장안(長安)에서 생각 

한다는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의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고성낙일'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요새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느낄 안타까움을 상상 

하여 그것을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 도와줄 수도 없는 상태이지만, 

풀이 죽어서 지쳐 있는 친구의 고성낙일 상태를 생각하면 처량하여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 일어난다는 내용의 시이다. 

여기서는 한갓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요새 밖의 쓸쓸한 풍경과 외로운 심 

정을 노래한 데에 지나지 않지만, '고성낙일'이라면 일반적으로 멸망의 그날을 

초조히 기다리는 그러한 심정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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